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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희

Category

소설

Author

지서희

Title

소록도

Released

2026.06

Cards1
Price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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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대표 글

소록도-민들레에게는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무참히 짓밟히고도 기어이 고개를 치켜드는 그 지독한 생명력이었으리라. 세상은 내가 악착같이 뿌리내렸던 자리를 말없이 파헤쳐 갔다. 바람이 갯길을 훑고 지나가면 갈대들이 비명처럼 일제히 몸을 눕혔고, 시퍼런 갯물은 검은 흙길을 타고 섬의 흉터 같은 안쪽까지 깊숙이 밀려들었다.나는 허물어진 담벼락 그늘에서 노란 숨 몇 송이를 꺾어 들었다. 이제는 주름이 깊게 패어 굳은살 박인 내 손마디가 민들레의 가녀린 줄기를 누를 때마다, 오래전 이 섬이 내게 입혔던 무감각의 기억이 역설적인 통증이 되어 되살아났다. 나는 물빛이 가장 짙고 어두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가 누군가의 비명처럼 길게 늘어지며 섬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안개 속에 갇힌 소록도는 늘 그런 식이었다. 파도 소리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거대한 지우개 소리 같았고, 갈대숲을 긁으며 번지는 바람은 주파수가 맞지 않는 낡은 라디오처럼 웅성거리는 환청을 실어 날랐다. 그 소리들은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고는 끝내 뭍으로 나가지 못한 영혼들의 이야기를 내 귓가에 쏟아부었다.나는 파도의 부서짐과 부서짐 사이, 수면 위에 민들레를 조용히 띄워 보내며 바닥에 닿을 듯 낮게 불렀다.“해일 씨.”바다를 향해 던진 이름은 언제나 물결에 휩쓸려 한 박자 늦게, 젖은 채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이름은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여긴 아직도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차마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긁어내렸다. 당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 생의 한가운데를 뻥 뚫린 빈칸으로 만들어버렸고, 그 공백은 시시때때로 남은 내 날들을 날카롭게 베어 넘기고 있었다.나는 기어코 그 섬을 살아서 빠져나왔고, 오랜 세월 묶여 있던 숨을 풀어내며 비로소 자유로운 바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사월만 오면 내 안의 바람은 어김없이 그날의 섬을 향해 역류했다. 소금기 밴 진득한 공기, 밤마다 절벽 아래서 들려오던 기괴한 파도 소리, 그리고 혀끝에 묻어둔 채 끝내 건네지 못한 한 문장. 그 문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효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단단하고 날카로운 화석이 되어갔다.그날, 벼랑 끝에서 누구의 손이 먼저 풀렸던 걸까. 당신은 왜 끝끝내 아무 말이 없었을까.나는 오늘도 멎지 않는 파도 앞에 서서 묻는다. 수십 번의 봄을 지나며 내가 이 바다에 던진 것은 진정 꽃이었을까, 아니면 썩지 않는 질문이었을까. 이 지독한 물음이 남은 생의 끝까지 나를 밀고 갈지, 아니면 결국 다시 그 섬의 먹먹한 물빛 앞에 나를 무릎 꿇릴지. 내 가슴팍에 낙인처럼 찍혔던 그 번호가 지워진 자리에, 이제는 당신의 이름만이 파도 소리를 내며 차오르고 있다....

Author's Note

지서희 작가의 말

지서희 작가의 말잊혀지는 것들과 잊을 수 없는 것들기억은 흐려지지만, 감정은 남는다.지나간 시간 속에서 우리는 때로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떠올리고,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을 그리워한다.이 글들은 그런 감정들의 기록이다.너무 익숙해서 소중한 줄 몰랐던 것들,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흘려보낸 순간들,그리고 뒤늦게 가슴속에 남아버린 말들.누군가의 마음에도 같은 기억이 있다면,이 글들이 그 조각들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작은 흔적이 되길 바란다.우리 모두 한 번쯤은 마주했을 감정들이니까.끝내 닿지 못한 인사들,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순간들.하지만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언젠가 또 문득 떠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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